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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6>망향가의 대명사 ‘타향살이’

[대중가요의 아리랑] <6>망향가의 대명사 ‘타향살이’

기사승인 2022. 08. 0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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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살이'는 가사가 짧으면서 4절까지 있는 드문 가요곡이다. '타향살이'는 망향가의 대명사이다.

우리 민족사의 질곡은 숱한 타향살이를 강요했다. 일제의 폭정과 전쟁의 참화 그리고 국토의 분단은 수많은 실향민을 양산했다.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식민지 상황은 그 자체가 타향의 시대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로 농토와 고향을 잃은 사람들은 유랑민이 되거나 만주나 연해주로 밀려났다. 타향에서의 삶이 고단할수록 고향은 더할 나위 없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작사가 김능인 또한 '타향살이'의 가사는 10년째 타향을 표류하던 자신의 솔직한 정서적 고백이나 마찬가지였음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래서 '타향살이'의 노랫말에는 미사여구가 필요하지 않았다. 가수 고복수의 목소리 또한 기교가 없다. 순박하면서도 처연한 계면조의 성음이 더 많은 공감을 불러왔다. 만주에서의 공연은 가수와 관객이 함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다가 기어이 눈물바다를 이루곤 했다.

노래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고 나면 웬지 모르게 속이 한결 시원해졌다. 일종의 카타르시스 작용이었다. 그것이 향수를 달래고 고달픈 삶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한 애조띤 트로트 가요의 시대적 역할이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은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일종의 감정적 연대감을 느꼈다. 그래서 '타향살이'는 겨레의 망향가였다.

김능인 작사, 속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의 '타향살이'는 고향의 상실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노래이다. 실향민과 유랑민의 서러운 심경을 가장 잘 대변한 노래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작곡을 전공한 손목인의 처녀작 '타향살이'는 이국에서의 신산한 삶을 묘사하며 조국을 잃어버린 가이없는 서러움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고복수는 자신의 출세작을 지은 손목인을 평생 스승으로 깍듯이 예우했다고 한다.

경남 울산 출생으로 음악을 유난히 좋아했던 고복수는 신인가수 선발대회를 거친 제1호 가수이다. 1934년 오케레코드사에서 '타향살이'를 내놓으며 식민치하에 신음하던 겨레의 서러움을 달래주었다. 원제목이 '타향'이었던 이 노래는 음반 발매 1개월 만에 무려 5만장이나 팔렸다. 엄청난 히트와 함께 노래의 제목을 더 가슴에 와닿는 '타향살이'로 바꾸고 레코드의 B면에 있던 곡을 A면으로 옮겼다.

필자 또한 대도시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고즈넉한 가을밤이면 '타향살이'의 애잔한 가락을 반복해 부르며 고향을 떠올리곤 했던 기억이 있다. 유행가는 시대의 상황과 대중의 정서를 담는 그릇이다. 방랑의 애환은 망향가를 소환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일제강점기야 오죽 했을까. 그것은 보헤미안의 낭만이 아닌 유랑민의 처량한 현실이었다. '타향살이'는 실향과 망국이 낳은 비가(悲歌)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제는 '고향'이란 개념조차 흐릿하다. 가난했지만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살던 고향의 풍정은 중장년층 이상의 기억 속에나 남아 있을까. 그렇지만 우리나라 인구의 45% 가량이 태어난 곳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고 있다는 최근의 통계도 있다. 타향살이의 애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가. 부평초 같은 삶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향살이는 영원한 애창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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