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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8> 실연의 비가(悲歌) ‘짝사랑’

[대중가요의 아리랑] <8> 실연의 비가(悲歌) ‘짝사랑’

기사승인 2022. 08. 2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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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아~ 뜸북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들녘에 떨고 섰는 임자없는 들국화/ 바람도 살랑살랑 맴을 돕니다' '타향살이'와 '짝사랑'을 빼놓고는 망향과 상실의 한을 달래주던 국민가수 고복수의 애잔한 삶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1934년 '타향살이'의 히트로 일약 스타가 된 신인가수 고복수는 '사막의 한'(1935)과 '짝사랑'(1936)으로 부동의 인기 가수 반열에 오른다. 20여 년에 이르는 가수로의 삶을 되돌아볼 때 고복수는 히트곡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고복수는 신곡을 계속 내놓으며 인기몰이를 하기보다는, 구수한 목소리로 기존의 히트곡을 지속적으로 부르면서 대중의 사랑을 보듬고 가는 스타일이었다.

'타향살이'와 '짝사랑'은 고복수가 평생을 우려먹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강산이 수십 번 바뀐 지금까지 한국인의 가슴에 살아있다. 노랫말에 담긴 겨레의 보편적인 이별의 정한 때문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트로트 곡은 유랑민의 방랑과 좌절, 이별의 슬픔과 눈물, 고향 잃은 설움과 한탄 등이 많다. 하지만 그 저변에는 망국민의 탄식과 저항의식이 정제된 시어와 은유적인 표현으로 자리하고 있다.

손목인이 작곡한 '짝사랑'은 고복수가 취입한 마지막 인기곡이나 다름없다. 1930년대 중후반에는 우리 대중가요계에도 내로라하는 작곡가와 작사가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또한 새로운 가수들이 시대를 반영하는 주옥같은 명곡을 내놓으면서 고복수의 입지가 좁아진 탓도 있었다. 아무튼 손목인이 작곡한 '짝사랑'은 당대의 대표적인 단조 트로트 곡으로 나라 잃은 서러움을 토로한 노래이기도 했다.

식민치하의 대중들은 속절없는 무력감과 쓰라린 울분을 노래로 해소했다. 온 겨레가 통탄하며 노래한 짝사랑의 대상은 바로 잃어버린 나라이기도 했던 것이다. '님의 침묵'을 노래한 독립운동가 한용운 시인의 '님'에 대한 관념과도 그 정서가 일맥상통한다. 님은 갔지만 님을 보내지 아니한 것이다. 고복수는 님을 잃고 조국을 상실한 민중의 우수와 탄식을 울음섞인 목소리로 대변했다.

'짝사랑'에서 '이즈러진 조각달'과 '임자없는 들국화'는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떠도는 스스로이기도 하지만, 나라를 빼앗기고 탄식하는 2000만 민족이기도 했던 것이다. 작사가 박영호가 그 같은 민족의 감성을 토속성 짙은 시어로 그렸고, 작곡가 손목인이 그 정감에 부응하는 애틋한 선율을 실었다. 고복수는 실연과 망국의 시대상황과 민중의 허망한 심사를 비감 어린 성음으로 토해낸 것이다.

'짝사랑'의 작사자는 분명 박영호이다. 그가 월북작가였기 때문에 이미 타계한 김능인으로 바꾸어 놓은 경우가 많았다. 노랫말 서두에 나오는 '으악새'를 두고도 '억새풀'이라는 해석과 관서지방 사투리로 '왁새'인 가을 철새 '왜가리'라는 주장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고복수의 아내는 '알뜰한 당신'을 부른 황금심이다. 두 사람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부 가수였다. 그리고 둘은 띠동갑의 알뜰한 잉꼬부부였다.

연령 차이 때문에 심한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을 한 덕분인지, 두 사람은 연예계에서도 스캔들 없이 잘 살았다. 하지만 고복수의 말년은 그의 노래 '짝사랑'처럼 비감이 어렸다. 6.25 전쟁기의 피랍과 탈출, 극영화 제작 실패 등에 따른 불운이 노가수의 심신을 멍울지게 했다. 영욕의 삶을 등지고 고복수는 떠났지만, '짝사랑'의 선율은 오늘도 '여울에 아롱진' '들녘에 떨고 있는' 우리 곁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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