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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연의 오페라산책]대구오페라하우스가 빚어낸 수작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손수연의 오페라산책]대구오페라하우스가 빚어낸 수작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기사승인 2022. 09. 03.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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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에 이른 제작 역량, 최정상급 성악가들 탁월한 기량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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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한 장면./제공=대구오페라하우스
8월은 가에타노 도니제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공연하기에 적당한 때일 수 있다. 실화를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 실제 사건이 일어난 시기가 8월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원치 않은 상대와 강제로 정략결혼을 하게 된 신부의 손은 염천의 무더위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지난달 26일 개막해 이달 4일까지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되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더욱 완성도 있는 무대였다. 2019년 초연된 이후 재 공연되는 프로덕션인 이번 오페라는 쉽게 보기 어려운 화려한 캐스팅으로 시작부터 화제를 모았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배역은 역시 루치아 역할의 소프라노일 것이다. 개막 무대에 루치아로 나선 소프라노 캐슬린 킴은 선과 결이 고운 음색과 호소력 짙은 연기로 관객의 기대를 완벽하게 만족시키며 큰 갈채를 이끌어냈다. 그는 섬세하고 탄탄한 발성과 표현력으로 본인의 음량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며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루치아의 내면을 잘 그려냈다. 1막 아리아 'regnava nel silenzio'에서 들려준 화려한 기교와 고음부의 노련한 피아니시모는 캐슬린 킴이 루치아 역할에 적역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광란의 아리아' 역시 흔들림 없는 음정과 탄력 있고 맑은 소리로 완벽한 가창을 선보였다.

그러나 빼어난 가창을 압도하는 것은 그의 연기력이었다. 피투성이 차림에 베일을 감싼 채 등장한 그는 혼신을 다한 연기와 절절한 감정의 표출로 객석을 몰입시켰다. 사실성 넘치는 캐슬린 킴의 연기는 아름답고 안정된 가창과 조화를 이루며 벨칸토 오페라의 정수를 맛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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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한 장면./제공=대구오페라하우스
에드가르도 역의 테너 정호윤 또한 명성에 걸 맞는 미성을 들려주었고 사랑에서 분노로, 다시 회한으로 이어지는 남자주인공의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특히 3막에서 정호윤이 노래한 아리아 '내 조상의 무덤이여'는 작품의 비극성을 완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비통한 절창을 타고 흐르는 선율은 앞서 펼쳐진 매드씬으로 인해 치솟았던 극도의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모두가 불행한 이 오페라의 서글픈 결말에 이입하도록 만들었다.

두 남녀 주인공 이외에도 엔리코 역할을 맡은 바리톤 이동환, 라이몬도 목사 역할의 베이스 류지상도 탁월한 기량을 보여줬다. 주요 배역 중 가장 먼저 등장한 이동환은 품위 있는 음색에 풍부한 성량으로 시작과 동시에 관객들을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향후 그가 베르디 작품에서 주역으로 다시 노래하는 모습을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이처럼 주, 조역 성악가의 역량이 골고루 뛰어나다 보니 2막에 나오는 6중창도 빛을 발했다. 이날 오페라는 정상급 성악가들의 만들어내는 균형 잡힌 앙상블을 감상하는 묘미도 매우 컸다고 본다.

연출을 맡은 오스트리아의 부르노 베르거-고르스키는 난해하거나 현대적 시도를 하기 보다는 원작에 충실한 무대를 재현했다. 무대 전체를 두루 활용해 인물을 배치하고 동선을 방사형으로 설정함으로써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했다. 김현정의 무대 디자인도 인상적이었다. 1막에서 루치아가 새벽녘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노래할 때 배경의 모습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그림과 같았다. 루치아는 마치 그림 속과 실제 무대를 넘나드는 것처럼 보여 달콤한 사랑의 장면이 더욱 환상적으로 다가왔다. 이번 오페라는 연출과 무대디자인, 의상, 조명 등이 모두 이질감 없이 효과적으로 어우러져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김광현이 지휘한 디오오케스트라도 벨칸토 오페라의 낭만주의 선율을 잘 살렸다. 디오오케스트라의 현악은 늘 수준급의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데 이번에는 목관악기 등 관악파트에서도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줘 성악부를 잘 뒷받침했다. 이날 공연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부분이라면 합창단을 들 수 있겠다. 대구오페라콰이어는 좋은 소리를 들려줬지만 이에 비해 경직된 움직임과 부자연스러운 연기가 눈에 띄어 주, 조역 성악가들과 융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동안 대구오페라콰이어는 오페라 안에서 중요한 한 축을 잘 담당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해 의문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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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한 장면./제공=대구오페라하우스
이번 공연을 보고 제작극장으로서 대구오페라하우스의 역량이 절정에 다다랐다는 느낌을 받았다. 재공연과 초
연 프로덕션을 적절히 배합해 무대에 올리고, 지역은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화제가 될 만한 캐스트로 성악가들을 섭외하고, 또 한국 오페라 현실에서는 보기 드물게 일주일 이상의 장기 오페라 공연을 이어나가며, 국제오페라축제를 통해 극장의 정체성을 확실히 구축해 나가는 등의 능력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대구오페라하우스는 한국의 대표적인 오페라 제작극장으로서 그 이름을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 대구라는 브랜드가 오페라하우스를 통해서도 세계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을 끝내고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오는 23일 개막하는 제19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를 향해 쉴 새 없이 달려간다. 가을 내내 대구에서 펼쳐질 풍성한 오페라의 향연이 기대된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단국대 교수


손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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