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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11> 화류계의 눈물 ‘홍도야 울지 마라’

[대중가요의 아리랑] <11> 화류계의 눈물 ‘홍도야 울지 마라’

기사승인 2022. 09. 2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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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홍도야 울지 마라'는 일제 치하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남매의 기구한 삶을 노래한 것이다. 그것은 화류계 여성의 탄식이자 서민 대중의 항변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광복 후에도 대폿집 주안상에 둘러앉아 젓가락 장단에 삶의 애환을 실어 부르던 국민가요나 다름없었다. '홍도야 울지 마라' 구성진 가락에 손님과 주모가 한 통속이 되어 저마다의 시름을 달래곤 했다. 이 노래가 첫 선을 보인 것은 1936년 7월 극단 청춘좌가 서울 동양극장에서 무대에 올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신파극의 주제가를 당시 스무 살의 김영춘이 부르면서다.

부모를 일찍 여읜 홍도는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다. 대학을 졸업한 오빠가 순사 시험에 합격하자 화류계 생활을 청산하고 시집을 갔지만 과거가 탄로 나면서 시어머니의 심한 학대를 받고 쫒겨난다. 유학을 다녀온 남편마저 자신을 외면한 채 부잣집 딸과 약혼을 하자 이성을 잃은 홍도는 시집 식구들에게 칼을 휘두르다 체포된다. 이때 홍도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형사가 바로 오빠였다.

북받치는 감정과 회한으로 홍도는 오열하고 오빠는 눈물어린 노래를 목메어 부르는 것이다. 극단은 당초 이 악극을 위해 '홍도야 울지 마라'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라는 2개의 노래를 만들었다. 음반 앞면에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뒷면에 '홍도야 울지 마라'를 배치했다. 그러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인기를 끌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결과는 완전히 반대로 나타났다.

악극의 제목 '사랑에 속도 돈에 울고'조차 '홍도야 울지 마라'로 통용될 정도로 노래는 히트를 쳤다. 악극도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무력에 대한 속절없는 체념과 순응은 신파적 비극미로 표현되는 문화적인 양상을 파생시켰다. '홍도야 울지 마라'는 동명의 영화 주제곡으로도 인기를 끌었다. 광복 후에도 여러 유명 가수가 리메이크하는 등 시대를 초월한 명곡이 된 것이다.

이른바 '사랑에 속고 돈에 우는' 홍도의 서러운 처지와 박복한 삶에 공명(共鳴)하며 눈물 짓는 기생들의 집단 관람으로 서울의 요정이 텅 비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18세의 어느 기생은 자신과 똑같은 홍도의 운명을 비관해 한강에 몸을 던지기도 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이렇게 조선 연극사상 최장기간 최다 관객 동원이란 전설적인 기록을 남기면서 한 시절을 풍미했다.

홍도는 '사랑을 팔고 사는' 천박한 여자가 아니었다. 지탄을 받아야 할 대상은 오히려 '명예와 지조를 팔고 살던' 친일파가 아니었을까. 가요와 연극의 드러난 주제는 화류계 여성의 사랑과 배신이었다. 하지만 노랫말 2절의 '구름에 싸인 달'에서 보듯이 '홍도야 울지 마라'는 식민지 조선의 어둡고 모순적인 사회상에 대한 항변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민족저항가로서의 소지를 다분히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1970년대까지도 이 땅의 숱한 누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도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이 많았다. 대도시의 여공과 버스 안내양이 되거나 부잣집 식모살이를 하면서 신산한 삶을 견뎌냈다. 더러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술집과 유흥가를 전전하며 불행한 삶의 굴레에 몸부림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홍도야 울지마라'는 그들의 노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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