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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성의 자연에세이] 원숙과 성숙의 계절

[이효성의 자연에세이] 원숙과 성숙의 계절

기사승인 2022. 09. 28.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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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주필
이효성의 자연 에세이 최종 컷
가을은 흔히 수확의 계절로 말해진다. 물론 모두 다 가을에 수확하는 것은 아니다. 보리, 밀, 완두 그리고 버찌, 매실, 자두 등 일부 곡식과 과일은 6월에 수확하는 것들도 있다. 또 옥수수나 복숭아처럼 8월에 수확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주식인 벼를 비롯하여 수수, 조, 기장, 콩 등과 같은 곡식 그리고 우리가 주로 먹는 과일인 포도, 사과, 배, 감, 대추 등의 수확은 대체로 9~10월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가을은 오곡백과의 수확철로 말해지기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 곡식과 과일은 거두기 전에 먼저 익어야 한다. 익는다는 것은 곡식이든 과일이든 그 씨앗이 여무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과일의 경우는 씨앗을 먹는 것이 아니라 과육을 먹기에 씨앗이 익으면 과육은 단맛을 더하고 그 빛깔도 초록에서 눈에 잘 띄는 노란색이나 붉은색 등으로 바뀌는데 이것을 과일이 익는다고 말한다. 이들 가을 곡식과 과일이 익는 기간은 대체로 초가을 즉 9월 어간이다.

9월이 되면 무더위는 가신다. 그와 함께 조석으로는 기온이 서늘하고, 낮에도 선선하고 건조한 바람이 분다. 그렇다고 더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9월에도 만만치 않은 늦더위가 있다. 무덥지는 않지만 한낮에는 햇볕이 상당히 따갑다. 곡식과 과일은 이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 속에서 무르익어간다. 곡식이나 과일이나 제대로 익기 위해서는 선선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 시인 릴케는 〈가을날〉이란 시에서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 마지막 과실에게 결실을 명하십시오. / 열매 위에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주시고"라고 말했을 것이다.

초가을에는 햇볕은 따갑지만 날씨가 무덥지는 않다. 가을의 햇볕은 곡식과 과일이 잘 익을 정도의 적당한 열기이지 너무 뜨거워 데이거나 해를 입힐 정도의 지나친 열기는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의 경우로 바꾸어 말하면, 피부를 그을리게는 하지만 화상을 입히지는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봄볕에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이는 시부모는 며느리보다 딸을 아낀다는 비유적인 뜻으로, 그만큼 가을볕은 여름볕이나 봄볕에 비해 더 약하고 부드럽다. 과학적인 조사로도 가을볕은 봄볕보다 자외선이 약하고 따라서 피부에 화상을 덜 입히고 기미와 잡티도 덜 생기게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초가을의 바람과 햇볕에 익는 것은 곡식과 과일이라는 사물만이 아니다. 그들과 함께 사람도 익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을의 선선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면 사람의 피부는 손상되는 일 없이 구릿빛으로 알맞게 그을리어 건강하고 다부지고 성숙한 모습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초가을의 바람과 햇볕 속에서는 곡식과 과일뿐만 아니라 사람조차도 익는 것이다. 초가을에 겪는 이런 외모에서의 변화는 가을에 밖에서 활동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외적 성숙의 모습이다.

그러나 가을의 성숙은 이런 외적 성숙으로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외관의 변화와 함께 익어가는 곡식과 과일의 변색에서 시절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만물의 변화를 깨닫는 지적 성숙을 얻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높푸른 하늘 아래 펼쳐지는 가을의 풍광과 날씨가 일으키는 까닭 모를 우수와 비애의 느낌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감성을 순화하는 기회를 갖게 하여 정서적으로도 성숙하게 만든다.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에 익어가는 곡식과 과일을 보면서, 그리고 가을 특유의 우수와 비애의 느낌 속에서 인간은 정신적으로도 성숙해 가는 것이다.

초가을에는 조석의 서늘한 냉기 그리고 한낮의 선선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이 어우러진 날씨에 의해 곡식과 과일은 무르익고, 그 속에서 인간은 지적, 정서적으로 성숙한다. 초가을은 그 특유의 날씨로 곡식과 과일도 그리고 인간도 성숙하게 만드는 원숙의 계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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