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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15> 나그네의 애환 ‘번지없는 주막’

[대중가요의 아리랑] <15> 나그네의 애환 ‘번지없는 주막’

기사승인 2022. 11. 06.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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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내리는 이 밤이 애절구려/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밑에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에 밤비도 애절구려/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는 길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이 노래는 '나그네 설움'과 함께 나라 잃고 떠도는 망국민의 애환을 구슬프게 토로한 유랑가요의 고전(古典)이다.

'번지없는 주막'은 '나그네 설움'과 더불어 가수 백년설의 최대 히트곡이자 당대 최고의 애창곡이었다. 유행가는 노래를 탄생시킨 그 시대의 감성으로 불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번지없는 주막'을 만든 예인(藝人)들이 들렀을 법한 당시의 주막집 풍경을 묘사해 본다. 능수버들이 바람에 나부끼니 무르익은 봄날의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다. 궂은비가 문풍지를 적시니 나그네의 서정도 물기가 흠뻑 배었을 법하다.

봉놋방에 둘러앉아 밤이 이슥하도록 술잔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저마다 가슴에 한두 자락씩 묻어두었던 애틋한 사연들도 밤안개처럼 피어올랐을 것이다. 하물며 가물거리는 초롱불 밑에 기약 없는 이별주 한 잔을 두고 귀밑머리 쓰다듬던 연인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나그네의 수심(愁心)도 깊은 감성에 젖어들기 마련이다. 여기서 '나그네'는 망국의 정한을 품고 떠도는 한민족이 아니고 무엇인가.

조선시대 후반에는 10∼20리쯤 떨어진 촌락마다 한두 개 정도의 주막이 있었다. 주로 장이 열리는 곳이나 역(驛)과 나루터가 있는 마을에 주막에 있었다. 먼길을 오가는 문인묵객들과 여러 곳을 다니며 장사를 하는 보부상과 행상들이 주요 고객이었다. 조지훈 시인과 박목월 시인의 '완화삼'과 '나그네'에 등장하는 '술 익는 마을' 또한 주막이 있는 정겨운 풍경이 아니었을까.

경북 예천에 삼강주막(三江酒幕)이 있었다. 흐린 전설처럼, 외딴섬처럼 낙동강 칠백 리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주막이었다. 20대 청상(靑孀)의 몸으로 시작해 70년을 지켜온 주막은 주모의 곡절 많은 삶이 아롱진 곳이었다. 게다가 여울져 흐르는 강물처럼, 구절구절 농익은 판소리 가락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애틋한 사연들이 주막에서 머물다 갔을까. 이 주막에는 문패가 있었을까. 번지가 있었을까?

도대체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조국의 상징적 이미지였다. 상실은 그리움을 배태하는 법인가. 작사가의 문학성과 작곡가의 음악성이 나그네의 서정을 물씬 풍기는 그 주막에 가고 싶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어서 더 그리운 그곳. 아주까리 등불 아래서 기약 없는 이별주를 따르던 사람과 주막. 당대의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이 다만 조국뿐이었을까.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 백년설 노래의 '번지없는 주막'(1940)은 식민지시대 조선인들의 처연한 내면풍경이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주막을 거쳐왔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얼룩진 술잔을 나누며 가슴속에 이별의 아픔을 새겼던가. 오늘 우리가 사는 곳 또한 '번지없는 주막'일 것이다. 물질의 풍요 속에서 정신의 피폐 속에서, 정녕 오늘 우리가 지향하는 발걸음은 정처가 있는가.

가수 백년설의 고향 경북 성주에는 '번지없는 주막' 노래비가 서있다. '나라 잃은 서러움과 민중의 한을 노래로 승화시켜 오랜 세월 애창되고 있다.' 노래비 뒷면에 새긴 글귀이다. 백년설(본명 이갑룡)은 고려 말 문신인 이조년의 후손이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춘심(一枝春心)'이 못내 겨워 '잠 못들어' 하던 700여 년 전 봄밤의 애상이 '번지없는 주막'으로 서럽게 환생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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