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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16> 기생의 한탄가 ‘화류춘몽’

[대중가요의 아리랑] <16> 기생의 한탄가 ‘화류춘몽’

기사승인 2022. 11. 1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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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꽃다운 이팔소년 울려도 보았으며/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연지와 분을 발라 다듬는 얼굴 위에/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신세/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 점잖은 사람한테 귀염도 받았으며/ 나젊은 사람한테 사랑도 했더란다/ 밤늦은 인력거에 취하는 몸을 실어/ 손수건 적신 적이 몇 번인고/ 이름조차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 '화류춘몽'은 기생들의 애환과 설움을 담은 노래이다.

'화류춘몽(花柳春夢)'은 제목부터 애잔하다. 숱한 기생들에게 '화류춘몽'은 자신들의 애달픈 처지를 오롯이 대변한 통곡(痛哭)의 비가(悲歌)였다. 특히 독백체의 탄식이 등장하는 노래의 마지막 소절에서 기생들은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눈물과 흐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우리네 사연을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작사가 조명암의 탁월한 솜씨 덕분이었다.

그의 문학성이 일제강점기 화류계 여인들의 서러운 삶을 그렇게 실감나게 그려낸 것이다. '화류춘몽'을 부른 기생 이화자의 삶도 애처롭다. 그는 시골 술집 여인에서 일약 전국적인 인기 가수로 변신한 사람이다. 이화자를 발굴한 사람은 작곡가와 가요인들이었다. '노래 잘 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가 허름한 행색에 실망했지만, 한 잔 술에 흘러나오는 애절한 목소리에 내심 무릎을 쳤다.

눅진한 아픔이 스며있는 이화자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는 듯 가냘프고 애틋했다. '화류춘몽'은 발표와 동시에 전국의 저잣거리를 강타했고, 이화자는 스타가 되었다. 노래를 듣고 화류계 여성들이 비관자살을 하는 파장까지 몰고 왔다. 이화자의 삶에도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인기가수라는 자만과 화류계 출신이라는 자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술과 마약으로 심신이 무너진 것이다.

언제 어디서인지도 모른다. 이화자는 35세의 한창 나이에 노랫말 그대로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인박명이다. 1960년대에는 월북작가(조명암 김해송)의 작품이란 이유로 '화류춘몽' 또한 금지곡이 되었다. 험난한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고달픈 삶을 살다가 물거품처럼 스러져간 한 떨기 해어화(解語花). '화류춘몽'은 이제 그 가련한 영혼들을 위한 조사(弔辭)로만 남은 것인가.

1930년대는 기생문화가 만연하던 시대였다. '권번'이라는 기생학교가 있었고 가난한 소녀들이 가족 부양을 위해 기생이 되었다. 그녀들의 눈물겨운 사연을 담은 노래가 바로 이화자의 '화류춘몽'이었다. 한시절 피었다 지는 무명화(無名花) 신세에 대한 한탄가였다. '화류춘몽'은 상처와 유린으로 얼룩진 기생들이 아픔을 고스란히 담은 기생가요였다. 화류계의 신분을 극복할 수 없는 한계와 절망의 노래였다. 화류계 여성의 사랑은 허망한 것이었다. 아낌없이 바친 순정도 비극적 파탄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 평양 기생 강명화 사건과 1930년대 카페 여급 김봉자 사건은 죽음으로 막을 내린 비련(悲戀)의 실제 상황이었다. 화류계 여성의 정한을 당시 언론이 주목했고 노래와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었던 시대적 배경이 곧 '화류춘몽'이란 처연한 명곡을 낳은 것이다.

'밤거리의 사랑은 마음대로 피우다가 버리는 담뱃불 사랑인가' 기생들은 고달프고 허망한 사랑과 운명을 탄식하며 '이름이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고 절규했다. 따지고 보면 기생만 그랬을까. 일제에 아부하거나 권력의 눈치를 봐야했던 지식인의 행보도 힘겨웠을 것이다. 하물며 가난한 서민들의 삶이야 오죽했을까. '화류춘몽'에 숱한 남성들도 취해서 울먹인 까닭이다. 그것은 겨레의 서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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