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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19> 만주 이주민의 망향가 ‘찔레꽃’

[대중가요의 아리랑] <19> 만주 이주민의 망향가 ‘찔레꽃’

기사승인 2022. 12. 0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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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객원논설위원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사람아//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앉아 찍은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찔레꽃'은 나라를 빼앗기고 고향을 잃어버린 채 멀리 만주에서 타향살이를 하던 유랑민들의 애절한 향수를 담은 노래다.

'대동아전쟁의 풍운이 휘몰아치던 시절, 우린 어느 때보다 슬픈 별 아래 살아야 했다. 절망의 황혼, 우린 허수아비였다. 슬픈 앵무새였다. 남의 전쟁터로 끌려가던 젊은이들의 충혈한 눈동자, 점심을 굶은 채 소나무 껍질을 벗기던 근로보국대 소년, 처녀들은 정신대에 뽑혀갈까 봐 시집을 서둘렀지. 가혹한 그 계절에도 찔레꽃은 피었는데...' '찔레꽃'의 오프닝 대사는 노래가 나온 시절과 정서를 웅변한다.

찔레꽃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찔레꽃은 유년의 간식이기도 했다. 새순 줄기를 뚝 꺾어 밑둥부터 껍질을 벗겨 먹으며 그 아련한 단맛으로 허기를 달래던 추억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궁핍하던 봄날인 4, 5월 보릿고개에 덤불 지어 피던 꽃이어서 찔레꽃은 더욱 애틋하다. 하물며 일제의 수탈을 피해 만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망국민과 실향민들이 찔레꽃을 보면서 느끼는 상념은 오죽했을까.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찔레꽃은 흰색이다. 그런데 가요 '찔레꽃'에서는 왜 붉다고 표현을 했을까. 고향을 그리는 애타는 마음이 하얀 꽃도 붉게 피워올린 것일까. 노랫말 속의 '남쪽 나라 내 고향에서 붉게 피는 찔레꽃'은 해당화일 것이라는 견해도 없지 않다. 꽃잎이 훨씬 크고 색이 붉은 해당화 역시 찔레꽃과 함께 장미과의 꽃이다. 또한 노래를 부른 백난아의 고향도 남쪽에 있는 제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꽃을 해당화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찔레꽃' 노래의 3절에는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란 구절이 나온다. '찔레꽃'은 작사가 김영일과 작곡가 김교성이 1941년 북간도 순회공연 중에 만들어 백난아의 목청에 실은 노래임을 방증하는 가사이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동포의 애환을 담은 노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바닷가에 피는 해당화가 북간도 산골에도 피었다고 볼 수도 어렵다. 드물긴 하지만 붉은색 찔레꽃도 있다고 한다. 1940년대는 식물명에 대한 분류가 명확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가시가 있는 꽃은 그냥 찔레꽃으로 통칭했을 가능성이 크다. 찔레꽃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시(찔레) 달린 꽃'을 의미한다. 다만 노래 속의 그 꽃이 장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꽃에 대한 정서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장미가 화려하고 정열적인 서양문화의 상징이라면 찔레는 애잔하고 처연한 당시 한국인의 정서를 담고 있다. 가수 장사익의 '찔레꽃'과 이연실의 '찔레꽃'을 보더라도 그렇다. 장사익의 '찔레꽃'은 '별처럼 슬프고 달처럼 서러운 꽃'이다. 그래서 늦도록 무명가수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닮아 목 놓아 울었던 것이다. 이연실의 '찔레꽃'도 애처롭기 그지없다. '배고픈 날 가만히 엄마를 부르며 따먹던 꽃'이다.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은 KBS '가요무대'에서 가장 많은 신청이 들어온 곡이다. 1940년대 태평레코드에서 막상 노래가 나왔을 때는 반응이 시들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 후 6.25 전쟁과 산업화 과정에서 파생된 실향민들의 심금을 울리는 노래로 공감을 얻으며 인기곡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망향가는 더 애절했을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가사도 조금씩 수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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