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강성학 칼럼] 국제평화와 안전을 약속한 유엔 : 그때와 지금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atoophoto.asiatoday.co.kr/kn/view.php?key=20220921010011994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2. 09. 21. 18:00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유엔의 목적은 우리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우리들을 구하는 것이다."

유엔의 제2대 사무총장이었던 다크 함마쉘드(Dag Hammarskjoeld)의 가장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유엔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2022년 2월 러시아가 유엔회원국인 우크라이나를 기습 침략하는 행위를 목격하면서 사람들은 유엔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더구나 유엔헌장을 누구보다도 잘 준수해야 할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러시아의 노골적 침략행위는 유엔헌장의 규정에 따라 마땅한 응징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침략문제가 유엔 안보리의 의제로 상정조차 되지 않고 있는 작금의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유엔의 창설의 과정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그런 기대는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 유엔은 강대국 간의 합의를 전제로 탄생한 것이지 강대국을 응징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원래 194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후 미, 영, 소, 중의 '4개 경찰국가'의 개념에서 출발했다. 후에 프랑스가 인정되어 5대 상임이사국이 주도하는 안보리는 국제사회의 전통적인 강대국체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지 그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창설된 것이 아니었다. 유엔의 창설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모든 회원국들이 참여하는 총회의 불필요성에 대한 주장에 처칠은 "작은 새들도 노래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독수리들은 작은 새들이 무슨 노래를 부르는가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말했었다.

자국의 권한을 극대화하면서 유엔을 보호하려는 미, 영, 소 3국들은 모두 총회를 토론을 위한 포럼으로만 인정했다. 그리하여 총회가 비록 어떤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고 할지라도 회원국들에게 오직 '권고'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회원국들에 구속력을 갖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안보리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상임 이사국인 강대국들 중 한 국가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유엔의 집단안보의 기능이 작동할 수 없다. 유엔헌장 제27조 3항에 의한 상임이사국, 즉 강대국의 거부권은 유엔의 법적 권한일 뿐만 아니라 실제 국제사회의 변함없는 냉혹한 현실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거부권제도가 없이는 유엔창설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떤 의미에서 유엔은 전후 국제사회의 새로운 서열을 제도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1945년 6월 유엔헌장이 채택된 지 미처 한 달도 안 된 7월 미국이 최초의 원자탄 실험에 성공하여 세계는 곧 핵시대가 되어버렸다. 더구나 1949년 소련마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을 때 세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안보적 환경에 접어들었다. 핵시대의 도래는 집단안전보장제도를 통해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모색하던 유엔엔 마치 네메시스(Nemesis)의 저주와 같았다. 핵 대결의 전략적 혁명은 유엔의 집단안보체제를 사실상 마비시켜 버렸다. 왜냐하면 핵전쟁을 감수하면서까지 헌장의 규정을 준수할 국가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제사회는 유엔체제보다는 경합적 초강대국들과 그들의 동맹체제에 의한 핵억제체제에 의존하게 되었다. 따라서 유엔은 자신의 헌장에 따라 행동할 수 없는, 즉 스스로 선포한 국제평화와 안전의 유지라는 국제적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유엔이 그동안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해서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에 대한 기습적 침략을 감행했을 때 유엔 안보리는 헌장의 제7장에 따른 군사력의 사용에 관한 첫 시험대에 올랐다. 당시 유엔은 미·소 간의 대립으로 제43조에 입각한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제47조에 규정된 군사참모위원회도 설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엔 안보리는 중국의 대표권 문제를 이유로 소련이 안보리에 불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 6월 27일 안보리는 결의안 83호를 통해 회원국들에 남한을 방어하도록 하는 조치를 결정하지 못하고 회원국들이 자발적으로 남한을 돕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엔의 한국전 개입은 그후 오랫동안 미·소 간의 냉전체제를 더욱 심화하고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90년에 들어서 냉전의 종식과 걸프전은 유엔이 마침내 헌장으로 복귀하여 유엔의 약속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전격 침략한 뒤 11시간 후에 소집된 유엔 안보리는 헌장 제7장에 입각하여 이라크가 즉각적이고 무조건 모든 병력을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안보리 결의안 660호를 채택하였다. 이라크가 이 요구를 거부하자 같은 해 11월 29일 안보리는 결의안 660호를 실현하기 위한 안보리 결의안 678호를 채택하고 1991년 1월 16일부터 2월 28일까지 미국이 주도하는 28개 회원국의 군사작전을 통해 이라크군을 모두 축출하고 쿠웨이트를 해방시켰다. 이것은 냉전종식 후 소련제국의 붕괴에 따른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압도적 영향력에 입각한 유엔의 조치였다.

그후 국제체제의 다극화 추세로 유엔은 또다시 그 권능을 상실하고 유엔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유엔의 실제적 한계와 참으로 실망스러운 비극적 역사를 안다면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행위에 대해 안보리가 의제로 채택하지도 못하는 유엔의 무(無)대응과 무능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유엔은 국제평화와 안전의 '약속된 땅'이 아니라 일종의 '실낙원'이라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