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이 장기화하다 보니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 당시에는 사람도 전리품이어서 젊은 남자는 노예로, 아름다운 여성은 첩으로 삼았다. 전쟁이 10년째 이르렀을 때, 그리스군 진영에 역병이 돌아 병사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그리스 장병들은 아폴론 신의 저주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폴론은 빛과 태양, 예술과 음악, 예언과 신탁, 질서와 이성, 균형과 조화, 치유의 신이었지만, 역병과 재앙을 가져오는 죽음의 신이기도 했다. 아킬레우스가 나서서 아가멤논에게 말했다. "아가멤논이여, 당신은 아폴론을 모시던 신관의 딸을 강탈해 전장에서 첩처럼 다루고 있소. 아폴론의 사제가 딸을 돌려 달라고 했는데도 당신은 총사령관이라는 권위에 젖어 아폴론 신관의 딸을 돌려주지 않고 있소. 그 때문에 지금 아폴론의 저주를 받아 병사들이 저리 죽어가는 것이오." 아킬레우스의 직언에 아가멤논은 첩으로 삼았던 신관의 딸을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도 전리품으로 획득한 미녀 브리세이스를 곁에 두고 있었다. 자기 여자를 돌려준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나 혼자만 바보처럼 여자를 뺏길 수야 없지. 나는 총사령관이다. 그러니 네가 아끼는 브리세이스를 내게 바쳐라"고 했다. 아킬레우스는 저항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군율에 따라 여자를 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분개한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나가지 않겠다며 병영에 틀어박혀 파업했다. 그가 없는 그리스군은 차차 수세에 몰렸다. 그 와중에 아킬레우스의 죽마고우 파트로클로스가 적군의 왕자이자 영웅인 헥토르와의 일대일 대결에서 전사했다. 친형제처럼 여기던 친구가 죽자, 아킬레우스는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하다가 직접 복수하겠다며 전장으로 나가 헥토르를 죽였다. 그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헥토르의 시체를 전차 뒤에 매달고 트로이 성 주변을 달리게 했다.
트로이 일리온 성에서 기품 있는 백발의 노인이 아킬레우스 막사로 찾아왔다. 트로이의 성주이자 황태자 헥토르의 아버지로 덕망 높은 프리아모스 왕이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은밀히 홀로 아킬레우스를 찾아온 것이다. "그대에게 부탁이 있소, 나는 그대의 적군인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라 하오. 그대가 쓰러뜨린 헥토르는 내게는 사랑스러운 자식이오. 그의 시체를 돌려줄 수 없겠소? 그대의 분노는 잘 알지만, 시체는 부디 돌려주기를 바라오." 적군의 왕이 제 발로 찾아왔으니 그를 죽여 버리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시체를 돌려주겠다며, "프리아모스여, 내 마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으로 이 진중까지 대담하게 찾아온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습니다. 아무리 혈기 넘치는 사내라 하더라도 파수병 눈을 피할 수 없으니 쉽사리 여기까지 오지는 못했을 것이오"라고 노인을 칭송했다.
그 뿐만 아니라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전쟁을 멈추자고 부탁했을 때, 그는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승낙을 받고 12일간 휴전했다. 그는 자식의 유해를 가지고 돌아가려는 노왕에게 "노인이여, 위험은 조금도 괘념치 않으시는가?"라며 귀로의 안부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리스인들은 힘세고 싸움 잘한다고 영웅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상대의 아픔을 알고, 연민과 배려의 마음이 있어야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국가 장례식장 모습을 떠올려 본다. 5명의 전·현직 대통령이 모두 모여 이념과 정파를 초월해 고인을 추모한 장면은 가슴 뭉클할 뿐만 아니라 한없이 부럽다. 이 광경을 뉴욕타임스는 '분열된 미국에 통합의 순간'이라고 평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추도사에서 "그를 통해 훌륭한 인격의 힘은 직함이나 권력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면서 "우리는 증오를 받아들이지 않고 가장 큰 죄악인 권력 남용에 맞서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전 대통령이자 당선인 신분이었던 도널드 트럼프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공화당의 상징인 붉은색 넥타이 대신 민주당을 상징하는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아킬레우스의 영웅적 면모를 생각하며 카터 대통령의 장례식 모습을 꿈과 비전, 국민 통합의 메시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탄핵 정국과 대비해 본다.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연민이나 배려가 없는, 증오와 혐오, 여과되지 않은 살기 가득한 거친 언행을 날마다 접하며, 국민은 한국 정치와 정치인에게 절망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환멸을 느낀다. 겸양의 미덕은 없고, 오만과 독선이 온몸을 휘감고 있는 성정이 잔인한 권력자는 영웅이나 지도자가 될 수 없고, 돼서도 안 된다. /시인·교육평론가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