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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스파르타쿠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칼럼]스파르타쿠스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기사승인 2021. 01. 3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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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
역사적 인물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키워드를 뽑아본다면 노예, 검투사, 반란, 영웅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작품을 꼽자면, 젊은 세대는 미국 드라마 ‘스파르타쿠스’(2010년 작)가 먼저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고, 50~60대 기성세대는 어린 시절 TV에서 명절마다 틀어준 특선영화 ‘스팔타커스’(스탠리 큐브릭 감독, 1960년 작)를 얘기할 것 같다.

두 작품 모두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창작자에 의해 새롭게 재구성된 팩션(faction)이다. 쉽게 말해 왜곡이 많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창작의 영역이기에 그 점을 콕 찍어 작품성을 공격하는 건 무리수가 있다고 본다. 어쨌든 이러한 공통점 외에도 실존 인물 스파르타쿠스와 영화 ‘스팔타커스’ 그리고 시리얼 드라마 ‘스파르타쿠스’는 역설적이게도 매우 모순된 방식에서의 교집합이 있다. 바로 ‘잉여’다.

먼저 드라마 ‘스파르타쿠스’는 부침이 많은 작품이다. 잔혹한 비주얼과 스펙터클 그리고 선정성으로 논란이 됐다. 더 당황스러운 건 주인공 역을 맡았던 앤디 위필드가 사망하는 바람에 예정된 속편을 찍지 못하고 있다가, 스파르타쿠스가 등장하기 전의 프리퀄 격인 ‘갓 오브 아레나’로 대체해 제작한다. 그러나 원래 계획에서 벗어난 번외작품인 이 시리즈는 높은 시청률로, 시청자들의 관음증적 반응을 끌어내기도 했다.

그렇듯 미드 ‘스파르타쿠스’는 전술한 바와 같이, 피가 낭자한 채 목이 달아나고 성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폭력과 섹스가 난무한 작품이다. 솔직히 청소년 시청불가라는 등급조차 무색하다. 노약자나 심신이 불안정한 사람들은 보지 않는 게 좋겠다. 한마디로 과잉된 이미지와 사운드는 서사 외적인 방식의 잉여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한편 영화 ‘스팔타커스’(당대 한국 개봉 시 ‘Spartacus’의 영어식 발음을 그대로 음차한 제목)의 연출을 맡은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제작 내내 제작자이자 주연배우이기도 한 커크 더글러스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급기야 큐브릭은 이 작품을 자신의 프로필에서 빼달라고 요청한다. 더글러스는 자신이 주인공 역을 맡은 스파르타쿠스를 더욱 영웅적으로 그려 달라고 요구했고, 감독은 이를 거절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하여튼 현재 검색창에는 스탠리 큐브릭 연출이라고 되어있지만, 감독 스스로 인식하듯 ‘스팔타커스’의 메가폰을 잡은 시기는 그에게 ‘잉여시간’이 돼 버렸다.

사실 스파르타쿠스의 난은 ‘잉여’로부터 출발한다. 로마 후기, 소수의 귀족계층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된다. 잦은 정복 전쟁으로 막대한 전쟁 노예가 유입되고 다른 한편에선 극심한 빈부격차로 와해된 평민계급의 노예화로, 귀족계층은 남아도는 노예들을 소비할 아이템을 찾게 된다. 권력은 잉여의 노예들을 검투사로 만들어 투기장으로 내보낸다. 검투사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귀족들을 열광케 한다. 어쩌면 그들은 ‘죽음의 소비’를 통해 시장을 안정화하려는 묘책에 스스로 도취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 사태로 소비가 위축된 현시점에도 명품매장은 불황을 모른다고 한다. 한 나라 경제 순환을 인체 혈류의 흐름에 비유한다면, 피가 통하는 부분이 특정한 곳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고 말초혈관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형국이랄 수 있겠다. 만약 평민 계층에까지 골고루 부가 분배됐다면 로마의 멸망은 훨씬 후대로 미뤄졌을 것이다. 부와 권력의 집중은 구조적으로 소외를 발생시킨다. 하지만 모든 잉여는 스파르타쿠스의 난처럼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재난지원금에 대한 방식이 전향적으로 이뤄져야 할 때다. 선별적이라는 명분으로는 혈류의 흐름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스파르타쿠스가 오기를 갈망하기보다, 그런 사태가 오지 않게끔 미리 사회 제반의 문제를 정비해야 함이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그 방식이란 사회 모든 계층에게 피가 돌게 만들어 욕창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살이 썩어 잘라 버려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되면 때는 늦었다. 누군가의 희생이란 대다수가 잉여의 부분에 강요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머뭇거릴 잉여의 시간조차 없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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