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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종식·소련 해체·한소 수교 주역 고르바초프 별세...푸틴에 비판적

냉전 종식·소련 해체·한소 수교 주역 고르바초프 별세...푸틴에 비판적

기사승인 2022. 08. 3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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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별세
냉전 종식·소련 해체·한소 수교 주역
독일 통일 수용...노벨평화상 수상
소련 해체로 사임 후 강연 활동...푸틴 비판
고르바초프 재단, 우크라 전쟁 중단·평화협상 개시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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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비에트 연방(소련)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4년 12월 21일(현지시간) 독일 북부 슐레스비후 홀슈타인 고토르프 궁전에서 열린 게르하르트 슈뢰더 당시 독일 총리와의 정상회담 이후 가진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대화하고 있다./사진=로이터=연합뉴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비에트 연방(소련) 대통령이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은 30일(현지시간)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심각하고 장기적인 질병으로 이날 저녁 별세했다"고 밝혔다고 러시아 타스통신 등이 보도했다.

타스는 관계자를 인용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된 2020년 이 병원에 입원해 요양을 계속했지만 그의 사인이 코로나19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전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89년 12월 냉전 종식 선언과 그해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 그리고 그다음 해 10월 동서독 통일 기여 등의 공로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가진 3개월 후 한국과의 수교를 결단하는 등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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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1월(현지시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비에트 연방(소련)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첫 정상회담을 갖고 웃고 있다./사진=로이터=연합뉴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54세 때인 1985년 일곱 번째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됐지만 3년 후인 1988년 공산당 일당 독재 폐기와 대통령제를 도입, 1990년 3월 초대 소련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는 집권 6년 동안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티(개방)' 정책을 추진해 이미 쇠퇴의 길에 들어선 소련의 정치·경제 체제 개혁을 시도했다. 아울러 글라스노스티 정책으로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따른 '신사고' 외교로 이데올로기 색이 강했던 소련 외교 정책을 전환했다. 그는 집권 8개월 만인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1987년 12월 레이건 대통령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및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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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24일(현지시간)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비에트 연방(소련) 대통령과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대화하고 있다./사진=AFP=연합뉴스
아울러 그는 동유럽 주둔 소련군 50만명을 일방적으로 감축했고,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을 1989년 2월까지 철수시켰다.

특히 그는 1989년 몰타에서 조지 H.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동서 냉전 종식을 선언했고, 1990년 10월 동·서독의 통일과 통일 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잔류를 수용했다.

하지만 그는 1991년 8월엔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중 일어난 쿠데타 미수 사건을 계기로 권력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 사실상 이양했고, 그해 12월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등 소련 소속 11개 공화국이 독립국가연합(CIS) 결성을 선언하고 소련이 붕괴하자 대통령에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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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23일(현지시간)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모스크바 의회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비에트 연방(소련) 대통령에게 문건을 낭독하도록 압박하고 있다./사진=AFP=연합뉴스
고인(故人)은 서방측에서는 '고르비'라는 애칭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세기 가장 큰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개탄하는 소련 붕괴를 초래해 러시아 내에서의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사임 후 '고르바초프 재단'을 창설해 해외에서의 강연과 환경보호 운동 등을 벌였다. 그는 1996년 옐친 대통령에 맞서 대선에 출마했지만 0.5%의 득표율에 그쳤다.

그는 푸틴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비판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했고, 고르바초프 재단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 개시 이틀 후인 2월 26일 전투 중단과 평화협상 개시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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